
일론 머스크가 구상만 밝혀두었던 초대형 반도체 프로젝트에 드디어 실제 자금을 집어넣기 시작했다.
테슬라와 스페이스X는 8월 6일 텍사스주 그라임스 카운티에 AI 반도체 공장 '테라팹(Terafab)'을 건설하겠다며 1단계 투자액 168억 달러를 확정했다. 우리 돈으로 약 23조 원, 삼성전자가 텍사스 테일러 공장을 처음 발표했을 때 내걸었던 투자 규모와 비슷한 수준이다. 지난 3월 오스틴의 폐쇄된 시홈 발전소에서 밑그림을 처음 공개한 지 다섯 달 만에 부지와 계약서, 세금 협약까지 모두 정리된 셈이다. 발표만 요란하고 흐지부지되는 프로젝트가 흔한 이 바닥에서, 서류에 도장이 찍혔다는 사실 자체가 하나의 사건이다.
눈여겨볼 대목은 이 공장이 남의 칩을 대신 만들어주는 파운드리 사업을 하려고 짓는 게 아니라는 점이다.
테슬라의 휴머노이드 로봇과 로보택시, 그리고 스페이스X가 궤도에 띄우겠다는 우주 데이터센터에 들어갈 칩을 스스로 조달하기 위한 시설이다. 반도체를 사서 쓰던 회사가 아예 공장부터 짓겠다고 나선 배경에는, 지금의 AI 칩 부족이 돈만으로는 풀리지 않는다는 판단이 깔려 있다. 애플이 자체 실리콘으로 넘어가고 구글이 TPU를 직접 설계한 흐름의 마지막 단계, 즉 설계를 넘어 제조까지 내재화하겠다는 시도로 읽힌다.
텍사스 그라임스 카운티, 1단계 168억 달러
부지는 휴스턴에서 북쪽으로 한 시간 남짓 떨어진 그라임스 카운티다. 인구 3만 명이 채 되지 않는 농촌 지역인데, 이곳에 계획된 건물의 연면적은 1억 제곱피트를 넘는다. 평으로 환산하면 약 280만 평, 여의도 전체 면적의 세 배가 넘는 크기다.
머스크는 이 시설을 두고 "지구상에서 가장 크고 가장 값비싼 건물이 될 것"이라고 말했는데, 도면상의 숫자만 놓고 보면 단순한 허풍으로 넘기기는 어렵다. 참고로 현재 단일 건물 기준 세계 최대로 꼽히는 시설들도 연면적이 1000만 제곱피트를 넘지 않는다.
이번에 공식화된 168억 달러는 어디까지나 첫 단계 금액이다. 스페이스X가 앞서 제출한 서류에는 그라임스 카운티 1단계에만 550억 달러가 들 수 있고, 여러 단계를 모두 합치면 최대 1190억 달러까지 불어날 수 있다고 적혀 있었다.
우리 돈 약 164조 원으로, 단일 제조 시설에 투입되는 금액으로는 전례를 찾기 어려운 규모다. 문서마다 숫자가 달라 보이는 이유는 확정 계약에 담긴 착수 금액과 장기 총사업비를 따로 기재했기 때문인데, 이런 방식은 대형 팹 투자에서 흔한 관행이기도 하다. 다만 투자자 입장에서는 실제로 집행이 확정된 돈이 168억 달러라는 점을 구분해서 볼 필요가 있다.
계약 조건도 함께 공개됐다. 스페이스X는 2030년까지 그라임스 카운티에 최소 50억 달러를 투자하고, 2035년까지 정규직 1800명을 채용하기로 법적 구속력이 있는 약속을 했다. 건설 기간 중에는 인근 브래저스 카운티를 포함해 3000개 이상의 일자리가 생길 것으로 지역 당국은 보고 있다. 텍사스주는 여기에 3000만 달러 규모의 텍사스 엔터프라이즈 펀드 보조금을 별도로 얹었다.
계약 체결 시점에 스페이스X가 환불 불가 조건으로 1000만 달러를 먼저 납입했다는 점도 이번 발표에서 확인된 내용이다.
공장에서 나올 칩의 종류도 대략 정리됐다. 테슬라 쪽에서는 옵티머스 로봇과 사이버캡에 들어갈 추론·엣지 연산용 칩이, 스페이스X 쪽에서는 위성형 데이터센터를 돌릴 고출력 칩이 주요 품목이다. 여기에 로직뿐 아니라 메모리와 첨단 패키징, 테스트 공정까지 한 부지에 몰아넣는다는 계획이라, 일반적인 파운드리보다는 수직 통합형 종합 공장에 가깝다.
웨이퍼를 만든 뒤 다른 나라로 보내 패키징하고 다시 들여오는 지금의 복잡한 공급망을 한 울타리 안에서 끝내겠다는 발상이다.
이론적으로는 리드타임과 물류 비용을 크게 줄일 수 있지만, 그만큼 한 곳에 모든 위험이 집중되는 구조이기도 하다.
"지구상에서 가장 크고 가장 값비싼 건물이 될 것" — 일론 머스크
인텔의 14A 공정을 빌려온 이유
테라팹은 처음 공개될 때 테슬라·스페이스X·xAI 세 회사의 합작으로 소개됐다. 그런데 로켓과 전기차를 만들던 회사들이 곧바로 최첨단 반도체 공정을 굴릴 수는 없다. 지난 4월 인텔이 프로젝트에 합류한 것이 그래서 결정적이었다.
머스크는 이후 테라팹이 인텔의 차세대 14A 공정에 기반할 것이라고 밝혔다. 장비를 사 오는 것과 그 장비로 수율을 뽑아내는 것은 완전히 다른 문제이고, 후자는 수십 년치 축적 없이는 살 수 없는 자산이다.
14A는 인텔이 파운드리 사업을 되살리기 위해 준비 중인 1.4나노급 노드다. 고개구수(High-NA) EUV 장비를 본격적으로 투입하는 세대로, TSMC의 대응 노드와 정면으로 맞붙는 자리에 놓여 있다. 인텔은 앞선 세대에서 대형 외부 고객을 확보하지 못해 파운드리 부문 적자를 이어왔고, 14A만큼은 확정 물량이 필요한 상황이었다. 반대로 머스크 입장에서는 남의 생산 능력이 비기를 기다리는 대신 자체 캐파를 확보할 기술 파트너가 절실했다. 서로의 결핍이 정확히 맞아떨어진 조합이라 볼 수 있다.
이 판단의 배경에는 AI 칩 수급의 구조적 문제가 있다. 첨단 로직 웨이퍼 생산은 사실상 대만과 한국의 몇 개 공장에 집중돼 있고, 엔비디아·애플·AMD 같은 대형 고객이 이미 몇 년치 물량을 예약해둔 상태다. 신생 수요자가 뒤늦게 줄을 서면 원하는 시점에 원하는 양을 받기 어렵고, 우선순위에서도 밀린다. 테슬라가 자율주행용 칩 물량을 확보하느라 겪었던 지연을 떠올려보면, 머스크가 왜 "필요한 칩은 직접 만든다"는 쪽으로 방향을 틀었는지 이해가 된다. 여기에 대만해협을 둘러싼 지정학적 불확실성까지 겹치면서, 미국 내 생산 거점을 갖는다는 명분도 함께 붙었다.
정리하면 테라팹에 참여한 각 주체의 역할은 대략 이런 그림이다.
- 테슬라·스페이스X — 자본을 대고, 생산될 칩의 최종 수요자 역할을 맡는다
- 인텔 — 14A 공정 기술과 팹 운영 노하우를 공급하는 기술 파트너다
- xAI — 초기 구상 단계부터 참여한 AI 모델 학습·추론 수요처다
다만 인텔의 참여 형태가 지분 투자인지, 기술 라이선스인지, 인력 파견을 포함한 위탁 운영인지는 아직 명확히 공개되지 않았다.
이 부분은 프로젝트의 성패를 가를 핵심 변수인데, 인텔이 자사 애리조나·오하이오 팹 투자와 테라팹 사이에서 한정된 엔지니어 자원을 어떻게 배분할지가 함께 걸려 있기 때문이다. 최첨단 노드를 동시에 여러 곳에서 띄우는 일은 인텔에게도 부담이 크다.
목표는 1테라와트, 숫자를 뜯어보면
테라팹이라는 이름은 '테라와트급 팹'에서 왔다. 완공 시 연간 1테라와트 규모의 AI 연산 능력을 공급하겠다는 것이 프로젝트가 내건 목표다. 프로젝트 측은 이 정도면 현재 미국 전체 반도체 생산량을 대략 두 배로 늘리는 수준이라고 설명한다.
물론 이는 완전 가동을 전제로 한 자체 추산이고, 연산 능력을 전력 단위로 환산하는 방식 자체가 업계 표준도 아니다.
마케팅 문구와 실제 캐파는 구분해서 읽는 편이 안전하다.
생산 능력은 단계별로 제시돼 있다. 초기 목표는 월 웨이퍼 투입량 10만 장이고, 장기적으로는 월 100만 장까지 끌어올린다는 계획이다. 월 100만 장은 감이 잘 오지 않는 숫자인데, 세계 최대 파운드리인 TSMC의 전체 월간 12인치 환산 캐파와 견줄 만한 규모다.
머스크는 이 단계에 도달하면 연간 1000억~2000억 개의 맞춤형 AI·메모리 칩을 찍어낼 수 있다고 말했다.
한 회사가 쓰려고 만드는 물량치고는 지나치게 크다는 지적이 나오는 이유이기도 한데, 옵티머스 로봇을 연간 수천만 대 생산한다는 테슬라의 장기 목표를 전제하면 계산이 아주 안 맞지는 않는다.
다만 반도체 공장은 발표와 가동 사이의 간극이 유난히 큰 산업이다. 부지 정리에서 클린룸 완공, 장비 반입, 수율 안정화까지 통상 4~6년이 걸린다. 업계에서는 테라팹의 시험 생산이 일러야 2028~2029년, 본격적인 양산은 2031~2032년쯤일 것으로 본다.
그 사이 오스틴 기가팩토리 부지에는 이미 시제품용 소규모 팹이 들어서고 있어, 여기서 확보한 공정 데이터를 그라임스 카운티 본공장으로 넘기는 구조다. 작은 팹에서 먼저 배우고 큰 팹에서 복제한다는 접근은 합리적이지만, 스케일업 과정에서 수율이 무너지는 사례도 업계에는 수두룩하다.
비교 대상을 놓고 보면 일정의 무게가 더 분명해진다. TSMC는 애리조나 1공장을 2020년에 발표하고 2024년 말에야 양산에 들어갔고, 그 과정에서 숙련 인력 부족과 현지 협력업체 문제로 여러 차례 일정을 미뤘다.
삼성전자의 테일러 공장 역시 가동 시점이 당초 계획보다 늦춰졌다. 두 회사 모두 수십 년간 팹을 지어온 전문 기업인데도 그랬다.
자본과 의지만으로 해결되지 않는 변수가 이 산업에는 유독 많다는 뜻이고, 테라팹은 그 학습 곡선을 처음부터 밟아야 하는 신규 진입자다.
물과 세금, 주민들이 던진 질문
지역에서는 환영과 우려가 동시에 나온다. 가장 예민한 쟁점은 물이다. 첨단 반도체 공장은 웨이퍼 세정에 막대한 초순수를 쓰는데, 대형 팹 한 곳이 하루 수만 톤을 소비하는 일도 드물지 않다. 테라팹은 지역 지하수를 끌어 쓰는 대신 인근 기번스 크리크 저수지에서 직접 취수하겠다는 방침을 밝혔다. 농업이 주력인 지역에서 지하수 고갈 우려를 피하려는 선택이지만, 저수지 수위와 하류 생태계에 미칠 영향은 여전히 논쟁거리로 남아 있다. 텍사스가 최근 몇 년간 반복적인 가뭄을 겪었다는 점도 주민들의 불안을 키우는 요소다.
세금 문제도 만만치 않다. 그라임스 카운티가 승인한 재산세 감면율은 약 78%에 이르고, 학교 재산세에 대해서는 JETI(고용·에너지·기술·혁신법) 프로그램에 따라 10년간 과세표준 상한이 적용된다. 지역 두 학군은 지난 7월 이 협약을 통과시켰고, 주지사 서명까지 마쳐 현재 효력이 발생한 상태다. 대신 스페이스X는 카운티에 연간 2000만 달러씩 35년간, 총 7억 1000만 달러를 납부하기로 했다. 우리 돈으로 약 1조 원에 가까운 금액이지만, 인구 3만 명 규모 카운티가 감당해야 할 도로·상하수도·학교 확충 부담과 비교했을 때 충분한지에 대한 판단은 갈린다.
주민들이 가장 자주 언급한 건 계약의 비대칭성이었다. 공개된 문서에 따르면 스페이스X는 30일 전 서면 통보만으로 아무 이유 없이 사업에서 철수할 수 있다. 반면 카운티는 이미 감면을 확정했고, 인프라 확충 계획도 이 공장이 들어온다는 전제로 짜놓은 상태다.
계약이 깨질 경우 손실은 온전히 지역이 떠안는 구조인 셈이다. 이달 초 나바소타 센터에서 열린 주민 설명회에 수십 명이 몰려 질문을 쏟아낸 것도 대부분 이 지점 때문이었다.
물론 지역 경제에 미칠 긍정적 효과를 기대하는 목소리도 크다. 정규직 1800명은 인구 대비 결코 작은 숫자가 아니고, 반도체 공장 주변에는 소재·부품·장비·물류 협력사가 자연스럽게 따라붙는다. 오스틴이 삼성 공장을 유치한 뒤 도시의 산업 구조 자체가 바뀐 사례를 그라임스 카운티도 기대하는 분위기다. 다만 그 변화가 지역이 원하던 방향인지는 집값과 교통, 학교 수용력까지 함께 놓고 최소 10년쯤 지나야 답이 나올 문제다. 실제로 오스틴은 성장의 대가로 주거비 급등이라는 청구서를 함께 받았다.
계약서상 스페이스X는 30일 통보로 철수할 수 있지만, 카운티의 세금 감면과 인프라 투자는 이미 시작됐다.
테라팹은 현재 발표된 계획만 놓고 보면 반도체 역사상 가장 야심 찬 단일 프로젝트다.
동시에 머스크가 지금까지 내건 목표 중 실현 난도가 가장 높은 축에 속한다. 로켓 재사용이나 대량 생산 전기차와 달리, 첨단 반도체는 후발 주자가 자본을 쏟아붓는다고 곧바로 따라잡히는 영역이 아니었다. 인텔의 공정 기술을 빌려온 것 자체가 그 벽을 인정한 결과에 가깝고, 역설적으로 이 프로젝트에서 가장 현실적인 판단이기도 하다.
그래서 앞으로 지켜볼 지표는 투자 발표액이 아니라 세 가지다. 오스틴 시제품 팹에서 나오는 초기 수율, 인텔 14A 공정의 실제 양산 성숙도, 그리고 그라임스 카운티의 전력·용수 인프라가 제때 갖춰지는지 여부다.
이 세 가지가 맞물려야 2028년 시험 생산이라는 일정이 유지된다. 반도체 공장은 삽을 뜨는 날보다 첫 웨이퍼가 나오는 날이 훨씬 중요하고, 그 사이의 거리는 지금까지 거의 예외 없이 계획서보다 멀었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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