스위스 남부의 조용한 호숫가 도시 로카르노가 하루아침에 한국 영화 팬들의 검색창을 점령했다.
배우 김민희가 아들을 낳은 뒤 처음으로 공식석상에 모습을 드러냈기 때문이다.
그 옆에는 홍상수 감독이 함께 있었고, 두 사람이 나란히 카메라 앞에 선 것은 출산 소식이 알려진 이후 처음이다.
무대에 오른 이유도 분명했다. 홍 감독의 신작이자 김민희가 주연을 맡은 '눈 둘 데가 없네'가 제79회 로카르노국제영화제 국제경쟁 부문에 초청됐기 때문이다.
이날 공개된 발언은 짧았지만 파장은 작지 않았다. 김민희는 아이를 낳고 처음 카메라 앞에 섰던 경험을 담담하게 풀어놨고, 촬영장에 아기를 데리고 다니며 수유와 이유식을 병행했다는 이야기까지 꺼냈다.
그동안 국내 매체 인터뷰나 시상식에서 거의 볼 수 없었던 배우가 육아라는 지극히 사적인 영역을 스스로 언급한 셈이다.
국내 포털과 커뮤니티가 하루 종일 이 소식으로 들썩인 데는 그런 이례성이 있었다.
2년 만의 공식석상, 로카르노에서 나란히 선 두 사람
이번 등장은 제79회 로카르노국제영화제 현장에서 이뤄졌다. 로카르노영화제는 8월 5일부터 15일까지 열흘 넘게 이어지는 스위스 최대 규모의 국제영화제로, 8천 석 규모의 야외 광장 '피아차 그란데'에 대형 스크린을 세우고 밤마다 상영을 진행하는 독특한 운영으로 유명하다. 칸이나 베니스처럼 화려한 스타 마케팅보다는 작가주의 감독과 실험적인 형식에 무게를 두는 영화제로 분류된다.
홍상수 감독의 작품 세계와 결이 잘 맞는 무대이고, 실제로 이 영화제는 오래전부터 그의 신작을 꾸준히 받아왔다.
두 사람은 현지시간 13일과 14일에 걸쳐 진행된 공식 상영과 관객 질의응답(Q&A) 행사에 함께 참석했다.
김민희는 이 작품에서 주연 배우일 뿐 아니라 제작실장으로도 이름을 올렸다. 카메라 앞에서 연기하는 동시에 현장 살림을 챙기는 역할까지 맡았다는 뜻이다. 소수 인원으로 빠르게 찍는 홍상수 감독의 제작 방식을 감안하면 형식적인 크레딧이라기보다 실제로 상당한 실무를 감당했을 가능성이 크다.
두 사람이 공식 행사에 함께 선 것은 지난해 아들을 얻은 뒤 처음이다. 출산 사실이 알려진 이후에도 이들은 별도의 기자회견이나 인터뷰를 열지 않았고, 국내 활동도 사실상 없었다. 그 공백이 길었던 만큼 이번 등장 자체가 뉴스가 됐다.
사진 속 김민희의 분위기가 예전과 달라졌다는 반응, 두 사람의 표정이 한결 편안해 보인다는 반응이 온라인에서 빠르게 퍼진 것도 그런 배경 때문이다.
이번 로카르노 행사에서 확인된 사실만 정리하면 다음과 같다.
- 작품 — 홍상수 감독의 35번째 장편 '눈 둘 데가 없네', 국제경쟁 부문 초청
- 참석 — 홍상수 감독, 주연 겸 제작실장 김민희가 공식 Q&A에 동반 참석
- 의미 — 김민희의 출산 이후 첫 공식석상이자, 두 사람의 첫 공동 공개 일정
영화제 자체의 무게도 가볍지 않다. '눈 둘 데가 없네'는 국제경쟁 부문에 올라 최고상인 황금표범상을 두고 경쟁한다.
홍 감독은 2015년 '지금은 맞고 그때는 틀리다'로 이미 이 상을 받은 적이 있어, 수상이 확정될 경우 같은 영화제 최고상을 두 번 가져가는 감독이 된다. 이번 작품은 로카르노에 공식 초청된 그의 다섯 번째 영화이기도 하다.
유럽 주요 영화제가 특정 감독의 작품을 이 정도로 반복해서 초청하는 사례는 흔치 않다.
"촬영장에서 수유하고 이유식을 만들었다"
이날 관객과의 대화에서 가장 많이 인용된 대목은 촬영 현장 이야기였다. 김민희는 아이를 낳은 뒤 처음 카메라 앞에 섰던 시기를 떠올리며, 예전과 같은 상태로 연기하기는 어려웠다고 솔직하게 말했다. 배우가 자신의 컨디션 저하를 공개 석상에서 인정하는 일은 생각보다 드물다. 홍보를 위해 마련된 자리에서는 보통 작품에 대한 확신과 자신감을 앞세우기 마련이기 때문이다.
"아기를 낳고 처음 영화를 찍었다. 출산 후 2년 정도 쉬고 처음 영화를 찍게 되어서 제 상태가 예전과 좀 달랐다."
이어진 설명은 더 구체적이었다. 그는 현실적으로 시간이 빠듯했고 촬영이 진행되는 동안에도 아기가 현장에 함께 있었다고 밝혔다.
수유를 해야 했고 이유식도 만들어야 했으며, 그 일들을 촬영장에서 그대로 해냈다는 것이다.
연기와 육아를 같은 공간에서 동시에 처리했다는 말인데, 대규모 상업영화 현장에서는 상상하기 어려운 풍경이다.
반대로 말하면 홍상수 감독 특유의 소규모 제작 시스템이었기에 가능했던 방식이기도 하다.
이 발언이 화제가 된 이유는 단순한 미담이어서가 아니다. 한국에서 30대 여성 배우의 출산은 여전히 경력 단절과 직결되는 사안으로 읽힌다. 임신과 출산을 전후해 작품 활동이 끊기고, 복귀 시점을 잡지 못한 채 몇 년이 흘러가는 사례가 반복돼 왔다.
그런 맥락에서 "아기를 데리고 촬영장에 나갔다"는 구체적인 진술은 개인의 선택을 넘어 업계의 구조를 다시 들여다보게 만든다.
육아휴직도 대체 인력도 없는 프리랜서 직군에서 일과 양육을 어떻게 병행할 수 있느냐는 질문이기 때문이다.
물론 이를 일반화하기는 어렵다. 홍상수 감독의 영화는 제작진이 극도로 적고 촬영 기간도 짧으며, 대사와 동선을 현장에서 즉흥적으로 결정하는 경우가 많다. 스케줄이 유연하니 아이를 데리고 갈 여지도 생긴다.
수십 명이 움직이고 하루 단위로 장비 대여료가 나가는 상업영화 현장에서 같은 선택을 하기는 사실상 불가능하다.
그럼에도 이번 사례가 회자되는 것은, 적어도 하나의 대안이 실제로 작동했다는 사실 자체가 드물기 때문이다.
발언이 포털 검색어를 타고 빠르게 번진 데에는 표현 방식도 한몫했다.
그는 육아를 미화하지도, 희생으로 포장하지도 않았다. 상태가 예전 같지 않았다고 인정하면서도 그 조건 안에서 작업을 마쳤다는 사실만 담담하게 전달했다. 화려한 수식 없이 사실만 나열하는 이런 화법은 오히려 전달력이 강하다.
실제로 온라인에서는 아이를 키우며 일하는 사람들의 공감 댓글이 기사마다 길게 이어졌고, 연예 뉴스라기보다 일하는 부모의 이야기로 읽혔다는 반응도 적지 않았다.
'눈 둘 데가 없네'는 어떤 영화인가
정작 이번 로카르노행의 본체는 작품이다. '눈 둘 데가 없네'는 홍상수 감독의 35번째 장편으로, 부모의 갈등을 겪은 뒤 조부모 손에서 자란 상희가 남동생과 함께 어머니를 찾아 제주도로 향하는 이야기를 그린다.
가족의 부재와 재회, 그 사이에 놓인 어색한 시간을 다룬다는 점에서 그가 오래 붙들어온 주제와 이어진다.
극적인 사건 대신 인물들이 마주 앉아 대화하고 어긋나는 순간을 길게 담아내는 방식도 여전할 것으로 보인다.
이번 작품에는 배우 최명길이 함께했다. 홍상수 감독과 최명길의 협업은 이번이 처음이다.
오랜 기간 안방극장에서 강한 인상을 남긴 배우가 홍상수의 화면 안으로 들어왔다는 점에서, 국내 관객에게는 그 자체로 흥미로운 조합이다. 홍 감독은 기성 배우의 익숙한 이미지를 덜어내고 일상적인 말투와 표정을 끌어내는 데 능하다는 평가를 받아왔다.
최명길이 그 안에서 어떤 얼굴을 보여줄지가 이 작품의 관전 포인트 가운데 하나로 꼽힌다.
김민희의 위치도 짚어볼 만하다. 그는 2016년 이후 홍상수 감독의 작품에만 출연해 왔고, 최근 몇 년 사이에는 배우를 넘어 제작 영역까지 관여해 왔다. '도망친 여자', '인트로덕션', '소설가의 영화', '수유천' 등으로 이어진 필모그래피는 상업영화에서 흔히 말하는 흥행 성적과는 무관하지만, 유럽 영화제에서는 꾸준히 호명돼 왔다. 2024년 '수유천'으로 로카르노에서 연기상을 받은 이력도 있다.
국내 대중에게는 보이지 않는 곳에서 커리어가 이어져 온 셈이다.
연출 방식도 결과에 영향을 준다. 홍상수 감독은 대개 자신이 촬영과 편집, 음악까지 직접 맡고 제작비를 최소화하는 방식으로 작업한다. 그 덕분에 상업적 부담 없이 매년 한두 편씩 신작을 내놓을 수 있었고, 이런 다작이 오히려 해외 영화제에서 브랜드로 자리 잡았다. 이번에도 그 흐름 위에 놓인 작품이며, 국내 개봉 시점과 방식은 아직 구체적으로 공개되지 않았다.
작품의 기본 정보를 간단히 정리하면 이렇다.
- 줄거리 — 조부모 손에서 자란 상희가 남동생과 함께 어머니를 찾아 제주도로 향한다
- 출연 — 김민희(주연 겸 제작실장), 최명길(홍상수 감독과 첫 협업)
- 초청 — 제79회 로카르노국제영화제 국제경쟁 부문, 황금표범상 후보
제주도라는 공간을 택한 점도 눈에 띈다. 홍상수 감독의 영화는 서울 근교의 카페와 술집, 골목을 배경으로 삼는 경우가 많았는데, 이번에는 인물들이 육지를 떠나 섬으로 이동한다. 어머니를 찾아 떠나는 여정이라는 설정 자체가 그동안의 정적인 구조와는 다른 리듬을 만들 가능성이 있다. 물론 그의 영화에서 장소 이동이 곧 사건을 뜻하지는 않는다.
도착한 뒤에도 인물들은 결국 마주 앉아 이야기하고, 말과 말 사이에서 감정이 어긋나는 장면이 이어질 공산이 크다.
10년 가까이 이어진 협업, 여전히 엇갈리는 시선
이 소식을 두고 온라인 반응이 한쪽으로 모이지 않는 이유는 분명하다. 두 사람의 관계가 2016년 공개된 이후 국내 여론은 줄곧 냉랭했다. 김민희는 그 이후 국내 상업영화와 드라마, 광고에서 사실상 자취를 감췄고, 시상식이나 공식 인터뷰에도 거의 나서지 않았다. 이번 발언이 화제가 된 것도 그만큼 그의 목소리를 들을 기회가 없었다는 뜻이다.
기사 댓글창에서 축하와 비판이 뒤섞이는 풍경은 이번에도 반복됐다.
반면 해외의 평가는 국내와 온도가 다르다. 김민희는 2017년 '밤의 해변에서 혼자'로 베를린국제영화제 은곰상 여우주연상을 받았고, 이는 한국 배우가 베를린에서 받은 첫 여우주연상이었다. 이후에도 홍상수 감독의 작품은 베를린과 로카르노를 오가며 꾸준히 초청과 수상을 이어왔다. 올해 초에도 신작이 베를린영화제에 초청됐다는 소식이 전해졌다.
국내 활동이 멈춰 있는 동안에도 국제 영화제 무대에서는 이름이 계속 불렸다는 이야기다.
사생활에 대한 판단과 작품에 대한 평가를 어디까지 분리할 수 있는가. 이 질문은 지난 10년 가까이 한 번도 정리되지 않은 채 반복돼 왔다.
흥미로운 것은 시간이 흐르며 여론의 결이 조금씩 달라져 왔다는 점이다. 관계가 알려진 직후에는 비판 일색에 가까웠지만, 최근에는 작품과 사생활을 나눠서 보자는 의견도 눈에 띄게 늘었다. 이번 기사들에서도 육아와 촬영을 병행한 대목에 초점을 맞춘 반응이 상당수였다. 여전히 불편함을 표하는 목소리가 사라진 것은 아니지만, 10년 가까운 시간이 논쟁의 온도를 어느 정도 낮춘 것은 분명해 보인다. 대중문화 이슈가 시간을 견디며 재평가되는 전형적인 과정이기도 하다.
이번 로카르노 등장이 국내 활동 재개로 이어질지는 미지수다. 두 사람은 여전히 별도의 소속사 없이 움직이고 있고, 공식 창구를 통한 입장 발표도 거의 하지 않는다. 이번 발언 역시 영화제 Q&A라는 제한된 자리에서 나온 것이지 국내 언론을 상대로 마련된 인터뷰가 아니었다. 다만 출산 이후 처음으로 공개 석상에 섰다는 사실만으로도, 앞으로의 행보에 관심이 쏠릴 근거는 충분해졌다.
당장의 관전 포인트는 수상 여부다. 로카르노영화제는 8월 중순 폐막과 함께 황금표범상 수상작을 발표한다.
'눈 둘 데가 없네'가 이름을 올린다면 홍상수 감독은 같은 영화제에서 두 번째 최고상을 안게 되고, 김민희 역시 배우와 제작 양쪽에서 존재감을 다시 각인시키게 된다. 결과와 무관하게 이번 주 로카르노에서 나온 한 문장은 오래 회자될 것 같다.
촬영장에서 수유를 하고 이유식을 만들며 영화를 찍었다는, 그 담담한 진술 말이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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